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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양(洛陽)의 모란, 명실상부한 중국의 국화(國花)

2012/7/17 15:46:38   정보 출처:금교

 

품종이 많은 뤄양의 모란은 수많은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뤄양(洛阳)의 모란은 꽃잎이 크고 품종과 색깔이 다양하다

  ‘중국 천년의 제도(帝都, 황제가 거하는 도성) 곳곳에 모란 향기 가득하네.’4월 5일‘중국에서 모란의 도시’로 일컬어지는 허난(河南)성 뤄양(洛陽, 낙양)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2012년 뤄양 모란축제를 맞이하였다. 이는 벌써 30회를 맞는 중국 뤄양시의 모란축제이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뤄양시 전체가 울긋불긋한 모란으로 뒤덮이게 되어 있고 그야말로 온 도시가 모란의 바다에 푹 빠진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모란이라는 꽃은 예전부터 한적한 계곡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난초처럼 고요하거나,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아늑하거나, 눈 위에 피어나는 붉은 매화처럼 고결하지도 않았다. 모란은 일단 피어나면 혼신의 힘을 다해 경이로운 아름다움과 열정을 일시에 뿜어낼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봄의 주인을 꼽는다면 단연 모란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세심하게 모란의 내력과 그것에 부여된 의미를 파헤치는 과정은 마치 역사의 명제를 탐구하는 것과 같다. 중국 전통의 화초인 모란은 원래는 야생식물이었다. 가시나무와 마찬가지로 주산지는 티벳고원, 황허(黄河)유역, 빠산친링(巴山秦嶺), 산시(山西)성의 중탸오산(中条山), 허난(河南)성의 푸뉴산(伏牛山), 망산(邙山) 등지였다. 원시의 모란 군집의 연원은 3,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물이 진화하고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모란은 꽃잎이 커지고 품종과 색깔이 다양해지면서아름다움에 있어서 다른 꽃들을 압도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화보를 보게 되면, 수려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360여 종이나 등장하지만, 모란의 아름다움을 비길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모란은‘꽃 중의 꽃’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뤄양의 모란이 천하제일로 손꼽힐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면, 송나라(宋, 960-1279) 시대의 유명한 문인 구양수(歐陽修, 1007-1072)가“낙양의 토질이 꽃을 재배하는 데 가장 알맞기에 이 곳의 모란이 천하제일이다”라고 말한 것과 측천무후(武則天, 624-705)가 모란을 폄하했던 일화와 무관하지 않다.

  전설에 따르면, 측천무후가 즉위한 지 2년째 되는 해의 음력 12월 수도 장안(長安)에 큰 눈이 내렸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후원의 상림원(上林苑) 난각(暖閣)에서 술을 마시며 눈을 감상하고 있었으며, 이 때 갑자기 향기로운 꽃향기가 그녀의 코를 자극하였다. 원래는 매화꽃이 피어난 것이었다. 측천무후는 왕족과 궁녀들을 이끌고 화원으로 나아가 꽃들을 감상하기에 이르렀는데, 화원에는 수선화와 매화를 제외하고는 나무들이 모두 앙상한 나뭇가지만 있는 상태였기에 그야말로 단조롭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측천무후는 붓이 가는 대로 교지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내일 아침 화원에 다시 놀러 나올 테니, 얼른 봄 소식을 알리거라. 꽃들은 밤을 새워서라도 꽃을 피워 새벽 바람이 불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환관은 황급히 여황제의 교지를 걸어 놓았는데, 이는 꽃의 신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다음날 아침, 화원의 꽃들이 모두 화려하게 피어났으나, 오로지 모란만이 꽃을 피우지 않았다. 이에 측천무후는 크게 노하여 4,000여 그루의 모란을 뿌리 채 뽑으라고 명하였다. 측천무후는 장안에 있는 모란을 모두 뽑아내어 낙양으로 유배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모란을 화형에 처하기까지 하였다. 이로 인하여 모란은 몸이 숯덩이처럼 달구어졌지만 낙양이라는 땅의 기운을 얻게 되었다. 이듬해에 개화기가 되자 모란은 더욱 큰 꽃망울을 터트리게 되었으며, 향기가 온 천하에 가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휘황찬란한 꽃 색깔은 장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이 때부터 모란은 뤄양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실 문헌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수나라(隋, 581-918때부터 모란은 뤄양에서 재배되었으며, 당나라(唐, 618-907) 시기에 흥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는 송나라 때로 지금까지 무려 1,5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서기 604년, 수나라 양제(煬帝, 569-618)가 낙양(뤄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200리에 이른 서원(西苑)을 개척하였으며, 여기에 모란을 많이 심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실 모란화원이 탄생된 것이다. 이 때부터 야생상태였던 모란에게 처음으로 집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 모란은 황실의 정원에 자리잡고서 황실의 총애를 받는 화초로서의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에 이르러서 낙양은 국가의 제1수도 혹은 제2수도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그러면서 모란을 재배하고 감상하는 것이 유행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당나라 현종(玄宗, 685-762)은 모란을 매우 좋아하여 늘 낙양에 행차를 하여 모란을 구경하였다고 한다. 한 번은 양귀비(楊貴妃, 719-756)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모란과 미를 겨룰 것을 제안한 바 있다고 한다. 그녀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모란을 뿌리 채 파오게 하였다. 정오가 되어 그녀가 모란의 꽃밭에 서 있었는데, 서서히 시들어가던 모란이 양귀비의 뛰어난 용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자 현종은 기쁨에 넘친 나머지 “나의 귀비는 정말로 모란보다 아름답도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송나라의 신종(神宗, 1048-1085)은 심지어 낙양에서 진상한 모란의 휘황찬란함에 반한 나머지 황제의 신분도 잊은 채 꽃을 머리에 꽂았다고 하니, 역대 중국 황제들이 모란에 대해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가 있다.

  북송 말기, 중원지역이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노출되면서 낙양의 궁정화원은 하룻밤 사이에 초토화 되었고, 모란의 재배 및 번식도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중심지가 남송(南宋, 1127-1279)의 수도인 항주(杭州)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명나라 가정(明朝嘉靖,1522-1566) 연간에 이르러서 박주(亳州)와 조주(曹州) 사람들이 낙양에서 모란을 옮겨 심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모란의 산지로 급부상하게 된다. 사천(四川)의 천팽(天彭), 강소(江蘇)의 염성(盐城) 등 지역에도 뤄양의 모란이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뤄양 모란이 중국 전역에 보급된 것이다.

  뤄양의 모란이 국내 및 해외에서 유명해진 후에 뤄양에 와서 모란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수나라, 당나라 시기를 거치며 뤄양의 모란은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일본인들이 보물과도 같이 아끼는 물건이 되었다. 이웃 나라인 조선, 한국에서도 모란은 널리 재배되고 있다. 그 후, 아메리카,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도 모란을 들여오면서 뤄양의 모란은 중국을 대표하는 꽃이자, 세계적인 명화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1983년부터 뤄양은 매년 1회 모란축제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곳곳의 모란이 집집마다 향기를 뿜어내게 되었으며, 모란의 품종도 500여 종에 이르게 되었다. 매년 모란축제 기간 동안에 야오황(姚黄), 웨이즈(魏紫), 칭룽워뭐츠(青龍卧墨池, 청룡이 누운 검은 연못), 구이페이쭈이지우(貴妃醉酒, 술취한 양귀비) 등의 다양한 품종이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며 아름다운 자태로 피어난다. 이 기간 동안 뤄양은 꽃을 감상하기 위하여 몰려든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모란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이 곳이 인간의 세상인지 신선의 세계인지 분간을 제대로 못할 정도이다. 이렇게 볼 때,‘꽃이 필 때부터 질 때까지의 20일 동안 모든 사람들이 미치도록 그 아름다움에 빠져든다(花開花落二十日,一城之人皆若狂)’,‘오로지 모란만이 진정한 나라의 꽃으로 꽃이 피면 수도가 들썩인다(唯有牡丹眞國色,花開時節動京城)’라는 명문으로 옛 문인들이 붓과 먹을 아끼지 않고 모란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사진/허우허량(侯贺良) 류빈(刘斌) 쉬진리(徐金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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