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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 각석에 쓰여진 진시황의 고심

2017/2/3 9:14:12   source:금교

  산둥성 타이안(泰安)시 대묘(岱庙)박물관의 동어좌(东御座)에 있는 한 비감(碑龛) 에는 진나라 때 조각된 태산 각석 한 조각이 보존되고 있는데, 이는 태산 역사를 기록하는 최초의 각석이다. 각석의 전반 부분은 진시황이 태산을 순시할 때 승상 이사(李斯)가 중국의 문자를 통일한 다음의 소전(小篆)으로 조각한 것인데 진시황의 태산행을 기록하였다. 이 각석이 역사적 의미는 물론이고 서예가치도 매우 소중한 것이니 보기 드문 국보로 여겨지고 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6국(전국시대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초나라, 연나라, 제나라의 여섯 나라)을 통일하고 영정(嬴政)이 왕위에 올라가고 중국 역사 상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이상하게 진시황이 왕위에 오른 후 그의 후반생은 거의 다 중국의 동방 지역을 순시하는 길에 지냈다. 그 동안 세 번이나 태산 봉선(封禅, 제왕이 태산에 올라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리다)도 하였다. 이런 경우는 역대 제왕 중에는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그럼 진시황이 왜 이런 노고를 불구하고 동방을 순시하고 봉선을 했을까?

  천하를 점령하기가 쉽지 않지만, 지키기가 더 어렵다

  중국 고대 시기에 교통 불편에다가 물질적 조건이 발전되지 못해서 황제로서도 궁궐 밖에 나가서 순시하려면 그리 쉽지 않았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이 순시를 나갔을 때 “봉대풍, 우수파악, 심지풍우폭지, 휴우수하(逢大风,遇水波恶,甚至风雨暴至,休于树下).” 즉 진시황은 순시하러 가는 길에 폭풍우를 맞아서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그럼 황제로서 진시황이 궁궐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도 있는데 왜 불원천리하고 순시를 나갔을까? 이 질물을 풀려면 진시황 6국을 통일 후 3년째 당한 암살 사건부터 얘기해야 한다.

  어느 날, 진시황의 차량 행렬은 박랑사[博浪沙, 오늘 허난(河南)성 위안양(原阳)현 동쪽 교외]에 이르렀을 때 도로 위에 모래 언덕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기복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차량의 운행 속도가 순시간 줄여졌다. 그 때, 큰 망치 하나가 산 위에서 굴러 떨어져서 운행 중의 마차 한대를 덮쳐 버렸다. 이 마차는 보통 마차가 아니라 그의 외형이 정교하고 조형이 독특한데 차 안에는 분명히 진시황이 앉아 있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병사들은 이 상황을 보고 크게 놀라서 빨리 마차 앞으로 뛰어갔고 마차 커튼을 열자 안에 있었던 사람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알고보니 기민하고 눈치 빠른 진시황이 미리 위험을 예지해서 다른 마차를 갈아탔다. 이 사건은 바로 역사에 유명한 장량자진(张良刺秦, 서한 시기 명신 장량이 진시황을 암살하는 사건)이다.

  그 당시, 장량처럼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사람 한 두 명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시황의 황제 운명에 있어 큰 위험이 되었다.

  6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6국의 백성들이 마음 속으로 그의 통치에 귀순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반평생을 기울여 6국을 통일하는 데보다 더 어렵다는 것 이제 진시황도 알아챘다. 천하를 한층 더 융합시키기 위해 그는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순시를 나가는 것은 바로 그 중에 하나였다.

  동방 순시와 봉선의 고심

  이상하게 진시황은 5번의 동방 순시 중에 3번이나 제노(齐鲁, 현재 산둥)지역에 갔다.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기·고조본기(史记·高祖本纪)>에 의하면 진시황은 나라의 동남지역에 대해 항상 불안정한 우려를 갖고 있어 화근을 근절하기로 한다.

  <사기·고조본기> 중에 이런 기록이 있었다. 진시황이 초나라를 멸망시켜서 음양가 초남공(楚南公)은 “진나라를 멸망시킬 나라는 초나라다”는 예언을 한 적이 있있다. 그 당시의 초나라는 바로 진나라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시황이 동남지역을 우려한 이유는 더 하나 있는데 6국 중에 마지막 투항한 제나라도 동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 시기, 제나라는 진나라에 이어 두 번째 강한 나라였다. 진나라에 항복하기 전에 제나라는 성읍 60개를 보유하고 있고 또한 40년 동안에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서 병력을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래서 진시황이 제나라의 존재에 대해 항상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동남쪽에 위치한 제나라와 초나라를 전국 대통일의 국면에 융합시킬 수 있을까? 그 때 동방지역을 순시 나가는 데 외에 또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태산 봉선이었다.

  태산대학 태산연구소의 저우잉(周郢) 연구원은 “봉선이란 것 실은 제왕들이 하늘과 땅 간에 하는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곳이 위로 하늘과 통하고 아래로 땅과 통할 수 있는가? 고대 사람의 의식 중에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은 바로 동방에 있는 영산인 태산이란 곳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진시황의 태산 봉선은 천하 대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선고하는 동시에 자기의 나라를 다스리는 태도와 조치, 그리고 자기의 천하에 대한 공덕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런 종교적인 방식을 통해 자기가 가진 정권이 정당하고 합법적인 것이라고 전국 국민에게 증명했습니다”라고 태산학원의 류씽순(刘兴顺) 부교수는 덧붙였다.

  전국 대통일을 위한 태산봉선

  6국 통일 후 3년째 진시황이 봉선을 하러 태산에 갔다. 그 당시, 함양(咸阳)에서 태산까지 거의 1,000킬로미터의 거리가 있었다. 그는 음력 2월 초봄의 어느 날에 굴레미 마차를 타고 태산에 향한 길을 떠났다.

  태산 밑에 도착하자 진시황이 제노지역의 유생 70여 명을 불러 모아서 봉선의 구체적인 의식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이런 행사를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봉선의 의식에 대해 아는 대신은 거의 없었다. 그 때, 어떤 유생은 제왕들이 태산 정상에 올라서 하늘에게 제사를 지내려면 마차를 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기어이 타야만 하면 태산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산 위에 풀과 나무를 깔지 못하도록 부들로 마차바퀴를 싸서 올라가야 된다고 진시황에게 상주하였다. 하지만 이는 상고시대 산신이나 하늘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분명한데 진시황이 태산 봉선을 통해 그의 “전국을 통일시키고 천하를 점유하다”는 공적을 전시하는 기대에 부합되지 않았다. 이로써 불쾌감 가득한 진시황이 유생들을 해임해 버렸다. 봉선예를 거행할 때 그는 진나라 웅상제(雍上帝)에게 제사를 지내는 식으로 하늘에게 제사를 지냈고 나서 문무대신들을 이끌고 태산에 올라서 봉선을 했다.

  처음에 진시황은 제노지역의 유생들이 봉선식에 대한 건의를 모집하는 것을 통해 그들과의 거리를 줄이려고 했으나 마지막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노지역의 사대부들 간의 갈등이 한층 더 심화되었다.

  <사기·봉선서(史记·封禅书)>에 나중에 발생한 일을 기록했다. 진시황은 태산 봉선을 가는 길에 폭풍우를 맞아서 큰 송나무 아래서 비를 피했다. 이 일을 제노의 유생들을 알게 되어 비웃음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심시어 어떤 유생은 “진시황이 태산에 올라서 폭풍우에 맞아 봉선을 하지 못하였다”고 조롱했다. 이는 실은 진시황의 천자 신분에 대한 부정과 도발을 의미하였다.

  진시황은 6국 통일 후, 그의 가혹한 폭정으로 인해 진나라 정권이 짧은 15년을 거쳐 멸망해 버렸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동방지역에 순시를 나가는 것과 태산 봉선을 통해 중국이 진정한 대통일을 이루어지는 관념이 영원히 백성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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